전문적인 섭외&진행 노하우로 다져진 호오컨설팅은 행사 진행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자의 섭외를 통해 성공적인 행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강사님
강연일
조회수1565
안녕하세요. mc섭외 강연전문기업 호오컨설팅 입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강연은 김경란 아나운서의 동기부여 특강 '악으로 버텨냈던 죽음의 스케줄'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김경란 아나운서는 부산 mbc 아나운서를 시작으로 KBS 공채 아나운서로 KBS 뉴스라인, KBS2 스펀지, KBS1 열린음악회,
KBS1 사랑의 리퀘스트 등여러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며 쌓은 노하우로 강연, mc섭외로 행사 사회를 많이 진행 하십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젊은 만큼 값진 재산이 없거든요.
그래서 여러분께 오히려 응원을 정말 보내는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저의 첫 직장은 여러분께서 kbs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4학년 2학기 때 우연히 시험을 보게 된 부산 mbc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남아있는 학점은 있죠.
그래서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화요일 밤까지 저녁까지 근무를 하고
밤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와서 수요일 목요일 풀로 수업을 다 몰아듣고 목요일 밤 차를 타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서 금요일날 일을 하고요.
제가 수,목 비운 대신 토,일 근무를 다 하면서 그렇게 6개월을 보냈어요.
그 당시엔 ktx 없어서 새마을호 타고 다섯 시간씩 왔다 갔다 걸리면서 뭐 몸이 힘든 건 그럴 수 있다 쳐요.
저는 배운 거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맨날 퇴근하면서 보도국에서 그날의 뉴스를 이만큼씩 집어와요.
한 2시간 좀 넘으면 이렇게 목이 쉬더라고요.
그래서 목이 쉬어서 나오지 않을 때까지 읽다가 바로 옆으로 딱 쓰러져서 잠을 자고 정말 거의 매일같이 그런 생활을 했어요.
그래도 뉴스 실력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어떤 선배가 저한테 오더니 '경란아 너 어미에 조가 생긴 것 같아' 라는 얘기를 해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요.
아나운서분들 뉴스하는 거 들어보다 보면 뭐 뭐 뭐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약간 좀 자기만의 특성이 담긴 그런 버릇 같은 거 그거는 정말 고치기 어렵거든요.
혼자 연습을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습관이 생겨버린 거예요.
완전히 발등에 불 떨어진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어미를 여러 버전으로 만들었어요.
혼자 '그랬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랬습니다.'
한 네다섯 개 만들어 놓고 녹음을 다 했어요.
보는 선배님들마다 '선배님 이거 들어보세요. 1번 2번 3번 뭐가 나아요?'
'얼떨결에 3번이 나은 것 같아' 그러면 3번으로만 연습을 해갖고 '이거 중에는 뭐가 나아요?'
계속 그거를 선배들을 볼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계속 물어봤어요.
나중에는 선배들이 '야 너 징하다. 너 좀 그만해라 제발' 또는 '넌 대단하다. 너 이제 고쳐진 거 같아' 라는 얘기를 들은 거예요.
제가 그래서 그때 느꼈어요.
정말 내가 고치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 딱 먹고 죽어라 해보세요.
죽어라 하면 그 노력이 부메랑처럼 나한테 다시 다가와서 나에게 정말 가슴 뛰는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부산 mbc에서 치열하게 1년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용의 꼬리가 될 것이냐 아니면 뱀의 머리가 될 것이냐 저는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뱀의 머리가 되는 것보다 용의 꼬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년 동안의 부산 mbc의 값진 경험을 간직한 채 서울로 와서 kbs에 들어오게 됐어요.
세상에 여러 복이 있는데 저에게 참 유달리 가득 와서 안기는 게 이제 일복이에요.
오늘 끝나면 내일, 내일 끝나면 모레, 모레 끝나면 글피, 정말 이렇게 제가 2002년 말부터 뉴스 라인에 들어가게 됐어요.
뉴스 라인이라는 프로그램이 밤 11시 프로그램이고 그러다 보니까 심층 뉴스 프로그램이라 지금까지 10년 이상 된 베테랑 선배들이 하셨거든요.
근데 입사 2년 차인 저한테 덜컥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스케줄을 생각하면 어땠냐면 오후에 출근을 합니다.
출근을 하자마자 제가 그때 밤 12시부터 2시까지 하는 음악 fm의 라디오 dj까지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주말 거 녹음을 해요. 그러고 이제 그 녹음을 마치고 막 불이나게 와서 뉴스를 하고 끝나고 라디오 생방에 들어가요.
그러면 새벽 2시에 끝나요. 그다음에 개편이 되면서 새벽 6시로 뉴스를 옮기래요.
새벽 2시에 제 업무가 끝났었잖아요.
뉴스 광장은 새벽 2시 반에 기상을 해요.
막 시차가 엉클어지면서 뉴스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참고로 제가 뉴스 광장을 하면서 열린 음악회, 스펀지, 영화 탐험 등 프로그램을 다 하고 있었어요.
정말 그렇게 힘든 스케줄을 감당을 하다 보니까 위경련이 난 거예요.
너무 고통스러운데 이걸 안 하면 안 되니까요.
꾹 참고 '누구 기자의 보도입니다.' 이러고 딱 화면에 넘어가면 거기만 거의 오바이트가 나올락 말락하면서 막 고통스럽게 누워 있다가
저쪽에서 이제 'kbs 뉴스 누굽니다' 하면은 벌떡 일어나서 다음 뉴스를 진행하고 그런 식으로 버티면서 진짜 악바리처럼 버텼었어요.
'정말 남은 게 깡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완벽을 기하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저지만 저도 사람이잖아요.
그 방송 실수를 제가 심야 근무를 할 때 일어났어요.
9시 57분에 전화 한 통이 왔어요.
사람이 안 왔다는 거예요.
정말 머릿속이 노래지면서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전력 질주를 하면서도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하면서 전력 질주를 한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이제 다들 우려스러운 얼굴로 다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뉴스 원고를 가로채고 앉았어요.
한 20초 남았더라고요.
정말 그때부터 세상에 앞으로 5분이 남았는데 저는 거의 숨이 찬 게 아니라 우는 것과 부르짖는 것의 중간이어서 정말 우여곡절 끝에
'나 지금도 어지럽다' 생각하니까 4분까지 갔어요.
그럼 보통 4분 한 20초쯤에 날씨를 들어가요.
날씨를 읽으면서 훗날 지금 이제 앞으로 벌어질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전국으로 나의 이 부르짖는 울부짖는 소리가 방송이 됐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은가' 저에게 갑자기 묘책이 떠올랐어요.
끝에 어떤 식으로 사인을 하냐면 'kbs 제1라디오 10시 뉴스를 마칩니다. 지금까지 김경란이었습니다. 지금 시각은 10시 5분입니다.'
이렇게 하는데 때로는 시간에 따라서 조율이 가능하거든요.
'지금까지 김경란이었습니다'를 빼자. 적어도 일단은 전 국민이 나인 거는 나중에 이제 책임 소재는 묻겠지만 일단 그거만 빼자'
그리고 'kbs 제1라디오 10시 뉴스를 마칩니다' 해야 되는데 kbs 정말 다 빼고 '지금까지 김경란이었습니다'만 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경위서와 여러 군데 불려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꿈은 아나운서였는데요.
초반엔 그래서 열심히 했어요. 진짜 누가 뭐래도 열심히 했어요.
어느 순간 내 스스로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난 이제 뭘 보고 달려가야 되지? 더 이상 내 마음에 가슴 뛰는 설렘이 없었어'
그러던 와중에 운명 같은 전화 한 통이 걸려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진행하고 있던 kbs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프로그램에 아이티를 갈 수 있겠냐는 전화가 왔어요.
그때 제가 데일리 프로그램을 했던 게 클래식 fm이었거든요.
피디 선배가 우연치 않게 제 옆에 있었던 거예요.
'선배님 제가요 지금 아이티에 출장을 갈 수 있냐는 전화를 받았는데요. 아무래도 어렵겠죠?'
'출장인데 가야지' 이러시는 거예요.
당시에 아이티는 지진 난 지 한 달 됐어요.
그 국경을 딱 지나자마자 믿어지지 않는 세계가 제 눈에 펼쳐졌어요.
모든 게 다 회색이었어요.
나무도 회색이고, 길도 회색이고, 물도 회색이에요.
진짜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 말문이 막혔어요.
'그렇게 it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일단은 모자 가정에 가서 첫날은 텐트를 쳐줬는데 잘 곳이 생겼다고 되게 좋아했어요.
다음 날 한 게 급식이었어요.
아주 꼬맹이 세 네 살짜리가 숟가락 막 휘청거리면서 막 이러면서 먹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에휴 내가 도와줘야겠다' 싶어서 가고 얼른 그 숟가락을 이렇게 집어가지고 얼른 먹여줬어요.
근데 그 순간 이 아이의 눈빛이 정말 막 도끼 어린 눈빛으로 변하더니 절대 뺏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그걸 쥐고 막 그 숟가락을 막 뺏는 거예요.
자기 음식 뺏어갈까 봐요.
저 쪽 보니까 또 비슷한 애가 막 또 휘청거리면서 막 먹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얘는 어떻게 할까 한 번 노하우가 있잖아요.
살짝 숟가락을 빼고 재빨리 입에다 넣어줬어요.
그랬더니 애가 눈이 동그래서 나를 이렇게 보더니 입을 아 벌려서 제 숟가락을 받아 먹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째도 이렇게 줬어요.
그랬더니 얘가 갑자기 손을 이렇게 미루면서 저 먹으라고 해요.
근데 그 숟가락은 침범벅에 모든 게 다 이제 뒤섞여 있는 상황이긴 했어요.
그 눈빛을 아마 여러분도 봤어도 먹었을 거예요.
진짜 맛있게 먹었어요.
내가 앞으로 살아야 할 삶이 뭘까 그런 것들을 막 고민하고 있는데 리퀘스트에 어느 날 김혜자 선생님이 출연을 하셨어요.
그분께서 10년 전에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 염소를 선물해 주고 오셨어요.
근데 그 염소를 선물해줬던 그 가정에 10년 후에 찾아가신 거예요.
10년 전 염소를 주고 갔던 김혜자 선생님을 기억해요.
그러고 김혜자 선생님을 붙들고 안고 '당신이 주고 간 염소 때문에 우리 가정이 살 수 있었고 이 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이 아이가 결혼을 했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화면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김혜자 선생님한테 그 말씀을 드렸어요.
'선생님, 저도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랬더니 김혜자 선생님이 단호하게 한 말씀 하셨어요.
'경란 씨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만 사람들이 경란 씨의 말에 귀를 기울여줘.'
그때부터 제가 진짜 바뀌었어요.
'그래 내가 진짜 가치 있게 생각하는 그 삶.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위해서 내 울타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에서 독설 엄청 했어요.
'너 이 울타리 방 나가면 넌 그냥 똑같은 방송인일 뿐이야'
'너 언제까지 네가 사람들이 너를 기억해 줄 거라고 생각해? 너 당장 안 써버리면 끝이야' 정말 독설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 제 마음에 딱 뿌리가 서니까요.
어떤 독설, 어떤 단단한 바위가 저를 막 들어쳐서 깨도 전혀 흔들리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2012년 9월에 결심을 하고 퇴사를 했습니다.
전 확신이 있었어요.
내 삶은 그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고 그리고 내가 정말 가치 있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거라고
그 누구도 제가 퇴사를 결심했다라는 얘기에 이렇게 박수를 쳐주지 않았었어요.
근데 여기 와서 여러분께서 박수를 쳐주시니까 아 내가 정말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에 감사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사람마다 가치는 다 달라요.
중요한 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가 그것에는 시간을 충분히 할애해도 괜찮으니까요.
여러분의 시간 정말 잘 할애하셔서 내가 정말 가치 있다라고 여기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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